여행을 다녀온 뒤 며칠이 지나면 모든 순간이 똑같이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렸던 시간, 숙소까지 이동했던 과정, 아침에 잠깐 산책했던 순간처럼 평범한 장면은 점차 흐려집니다. 반면 예상보다 아름다웠던 풍경이나 정말 맛있었던 음식, 여행 마지막 날의 분위기는 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 누군가 "그 여행 어땠어?"라고 물으면 여행 기간 전체를 시간순으로 계산해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린 뒤 "정말 좋았어" 또는 "생각보다 별로였어"라고 전체 경험을 요약하기 쉽습니다.
행동과학에서는 이처럼 경험 전체를 모든 순간의 평균으로 기억하기보다 감정이 가장 강했던 순간과 경험의 마지막 부분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경향을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경험하는 순간과 기억하는 경험은 조금 다를 수 있다
하루 종일 즐거웠던 여행이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일정은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숙소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큰 불편을 겪었다면 여행을 떠올릴 때 그 장면이 유난히 강하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 상황도 가능합니다.
여행 중간에는 조금 피곤하고 예상과 다른 일도 있었지만 마지막 날 정말 만족스러운 경험을 했다면 전체 여행을 꽤 좋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경험한 시간은 여러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을 떠올릴 때는 모든 순간을 동일한 비중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기억에 강하게 남은 일부 장면이 전체 경험을 대표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피크'는 반드시 좋은 순간만 의미하지 않는다
피크라는 표현 때문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만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피크엔드 법칙에서 생각해 볼 피크는 감정이 강했던 순간에 가깝습니다.
매우 즐거웠던 장면이 될 수도 있고 크게 불편했던 장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한 시간 동안 즐겁게 식사했는데 계산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제가 금방 해결되었더라도 그 순간의 불쾌감이 매우 강했다면 나중에 음식점을 떠올릴 때 계산 과정이 먼저 생각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범한 식사였지만 직원이 예상하지 못한 친절을 보여줬다면 그 장면 때문에 전체 경험이 더 좋게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경험의 길이보다 감정의 강도가 기억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순간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 몇 분이 전체 인상을 바꾸기도 한다
'엔드'는 말 그대로 경험이 끝나는 부분입니다.
온라인으로 제품을 주문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품을 찾고 결제하는 과정까지는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배송된 상자를 열었을 때 포장이 깔끔하고 제품을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안내가 잘 정리되어 있다면 마지막 경험이 긍정적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제품 자체는 만족스러운데 교환이나 문의 과정의 마지막 응대가 좋지 않았다면 브랜드 전체에 대한 인상이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정보를 정리할 때 긴 글을 읽고 난 뒤 마지막 설명이 명확하면 전체 내용까지 정돈된 느낌을 받기 쉽다는 점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은 단순히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경험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식당에서 마지막 서비스가 기억에 남는 이유도 비슷하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시간은 한두 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입장하고 자리를 안내받고, 메뉴를 고르고, 음식을 기다리고, 식사한 뒤 계산합니다.
각 단계의 만족도는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음식점을 평가할 때 이 모든 순간에 각각 점수를 매겨 평균을 내지는 않습니다.
특히 맛있었던 메뉴 하나와 마지막 계산 과정의 경험이 전체 평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비스 경험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만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되는지도 중요합니다.
중간에 작은 문제가 있었더라도 마지막에 잘 해결되면 "그래도 대응은 괜찮았다"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긴 경험이 반드시 더 강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좋은 경험은 오래 지속될수록 더 좋게 기억될 것 같지만 기억은 그렇게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시간 동안 특별한 장면 없이 무난하게 즐거웠던 경험과 한 시간 동안 진행됐지만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던 경험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나중에는 두 번째 경험이 더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피크엔드 법칙을 설명할 때 경험의 지속 시간이 기억 속 평가에 예상보다 적게 반영되는 현상도 함께 이야기되곤 합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시간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랫동안 불편한 상황이 이어지는 것과 잠깐 불편한 것은 현실적으로 분명 다릅니다.
피크엔드 법칙은 모든 경험이 무조건 피크와 마지막 두 순간만으로 결정된다는 공식이라기보다, 기억을 바탕으로 경험을 평가할 때 특정 순간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피크엔드 법칙은 후광효과와도 조금 다르다
앞에서 살펴본 후광효과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일부 정보가 전체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심은 다릅니다.
후광효과는 한 가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특징에 대한 평가가 대상의 다른 특징까지 번지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디자인이 좋은 제품을 보고 성능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피크엔드 법칙은 여러 순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경험을 나중에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하는가에 더 가깝습니다.
여행의 가장 즐거웠던 순간과 마지막 날의 기억을 중심으로 여행 전체를 평가하는 식입니다.
하나는 특징 사이의 평가가 번지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경험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지막 경험은 다음 선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떤 서비스를 여러 번 만족스럽게 사용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이용에서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서비스를 선택할 때 과거의 여러 번의 좋은 경험보다 마지막의 불편한 경험이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너무 불편했는데."
이 기억은 다음 선택에 실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지막에 큰 문제가 있었다면 다음 선택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정보입니다.
다만 그 한 번의 경험이 평소에도 반복되는 문제인지, 우연히 발생한 예외적인 상황인지는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하게 기억나는 것과 자주 발생하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앞서 살펴본 가용성 편향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험을 기록하면 평범했던 순간도 다시 볼 수 있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에는 여러 장면이 기억납니다.
몇 달이 지나면 강렬했던 장면만 남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경험을 비교하고 싶다면 기억만 사용하는 것보다 간단하게 기록하는 방법이 유용하다고 봅니다.
여행이라면 숙소, 이동, 음식, 일정처럼 항목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제품을 일정 기간 사용해 보는 상황이라면 첫날의 인상만 적기보다 며칠 간격으로 불편했던 점과 편했던 점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지막 날 기분이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전의 불편을 모두 잊거나, 마지막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로 그동안의 장점을 전부 낮게 평가하는 일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기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빠진 평범한 순간을 기록으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좋은 경험을 만들 때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중요하다
피크엔드 법칙은 소비자의 판단만 설명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좋은 경험을 만들어야 하는 여러 상황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하루를 보내거나 친구들과 모임을 계획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는 활동 하나와 마지막 시간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조금 더 신경 쓸 수는 있습니다.
저라면 하루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면 마지막까지 활동을 꽉 채우기보다 여유 있게 마무리할 시간을 남기는 방식을 생각해 볼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모두 지쳐 서둘러 헤어지는 것보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끝나는 편이 전체 경험을 다르게 기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기억 하나로 전체를 판단하고 있는지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피크엔드 법칙을 일상에서 활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과거 경험을 다시 평가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행이 정말 최악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일정이 계속 나빴던 걸까, 아니면 특히 나빴던 한두 순간이 전체 기억을 대표하고 있는 걸까?"
반대도 가능합니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기억하는 서비스가 있다면 대부분의 과정이 만족스러웠는지, 마지막의 강한 좋은 인상이 전체 평가를 높이고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당시의 감정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다음 선택에 과거 경험을 활용하려면 어떤 부분이 실제로 좋거나 나빴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기억에 남는 경험과 실제 경험 전체는 같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 모든 장면을 같은 선명도로 기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몇몇 중요한 순간을 중심으로 경험을 압축해서 기억하는 방식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압축된 기억을 경험 전체의 정확한 기록이라고 생각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저라면 유난히 좋거나 나빴던 경험을 떠올릴 때 한 가지 질문을 더해보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말고 나머지 시간은 실제로 어땠을까?"
이 질문을 해보면 강렬했던 순간 뒤에 가려졌던 평범한 경험들이 다시 보일 수 있습니다.
피크엔드 법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좋은 마지막 장면을 억지로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 나중에 기억하는 경험 사이에는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가장 즐거웠던 순간도 중요하고 마지막 순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을 위해 과거 경험을 평가해야 한다면 그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평범한 순간까지 함께 떠올려 보는 것이 더 균형 잡힌 판단에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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