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쇼핑몰에서 의자를 찾다가 정가 30만 원, 판매가 18만 원이라고 표시된 제품을 발견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18만 원만 놓고 보면 적지 않은 가격입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30만 원이라는 숫자가 함께 표시되어 있으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18만 원짜리 의자라기보다 '30만 원에서 크게 할인된 의자'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30만 원은 이후 가격을 판단할 때 하나의 기준점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모든 정보를 처음부터 분석해 완전히 새로운 판단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먼저 접한 숫자나 정보에서 출발해 이후의 판단을 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처럼 처음 제시된 정보가 일종의 닻처럼 작용해 이후 판단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설명합니다.
앵커는 판단을 시작하는 기준점이 된다
처음 가보는 지역에서 원룸을 알아본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 확인한 방의 월세가 100만 원이었다면 이후에 본 70만 원짜리 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 본 방이 40만 원이었다면 같은 70만 원의 월세가 상당히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70만 원이라는 숫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전에 어떤 가격을 보았느냐입니다.
물론 실제 계약에서는 위치와 면적, 시설 등 다양한 조건을 함께 확인합니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일반적인 가격을 잘 모르는 상태라면 처음 접한 숫자가 판단의 출발점이 되기 쉽습니다.
앵커링 효과가 특히 눈에 띄는 상황도 이처럼 적절한 기준을 아직 잘 모를 때입니다.
정가와 할인가는 대표적인 가격 기준점이 된다
쇼핑을 하다 보면 판매가격 하나만 표시된 상품보다 정가와 할인 가격을 함께 보여주는 상품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5만 원이라는 가격만 보면 소비자는 그 상품이 5만 원의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가 9만 원 → 판매가 5만 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면 9만 원이라는 숫자도 판단에 들어옵니다.
이때 소비자는 제품 자체의 가치뿐 아니라 4만 원을 절약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처음 제시된 기준가격이 실제로 얼마나 의미 있는 숫자인지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평소에도 비슷한 가격으로 판매되는 상품이라면 높은 정가가 표시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좋은 구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할인 상품을 비교할 때 할인율보다 실제 판매가격을 먼저 보고 비슷한 제품의 평소 가격과 비교하는 편이 판단하기 편합니다. 기준가격을 잠시 가리고 보면 필요한 제품인지도 조금 더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협상에서도 처음 나온 숫자가 중요해질 수 있다
중고 물건을 거래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판매자가 처음에 20만 원을 제시하면 이후의 협상은 20만 원 주변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매자가 15만 원을 제안하고 판매자가 18만 원을 다시 제시하는 식입니다.
반대로 처음 제시된 가격이 12만 원이었다면 협상의 범위 자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 부른 가격이 무조건 최종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매자는 다른 판매자의 가격을 확인할 수 있고 판매자 역시 중고 시세를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장가격을 정확히 알기 어려운 상품에서는 처음 등장한 숫자가 협상의 기준으로 작용할 여지가 커집니다.
그래서 협상 전에 비슷한 거래 사례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부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이 처음 제시한 숫자에만 의존할 필요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앵커는 가격이 아닌 숫자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앵커링 효과를 가격 할인에만 적용되는 현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배송 예정 시간이 먼저 10일이라고 안내된 뒤 7일로 변경되면 생각보다 빠르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7일이라고 안내받았다면 같은 기간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업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납니다.
어떤 작업에 "보통 3일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를 먼저 들으면 이후 일정을 계획할 때 3일을 기준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하루 만에 처리할 수 있는 업무라도 처음 접한 예상 시간이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앵커는 반드시 돈일 필요가 없습니다.
수량이나 시간, 비율처럼 비교 가능한 여러 정보가 판단의 출발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라면 앵커링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특정 분야의 경험이 많다면 적절한 기준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관련 없는 숫자의 영향을 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특정 상품을 거래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가격 범위를 알고 있으므로 지나치게 높은 최초 가격을 보더라도 그대로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문지식이 있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앵커링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제품이나 익숙하지 않은 조건처럼 기존 경험을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나는 경험이 많으니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판단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준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가격이라면 시장의 비슷한 상품을 비교하고 업무시간이라면 이전 작업 기록을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프레이밍 효과와 앵커링 효과는 어떻게 다를까?
앞선 글에서 살펴본 프레이밍 효과와 앵커링 효과는 실제 소비 상황에서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중심은 조금 다릅니다.
프레이밍 효과는 같은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현상에 초점을 둡니다.
앵커링 효과는 먼저 접한 숫자나 정보가 이후 판단의 기준점이 되는 현상에 초점을 둡니다.
'10만 원을 절약합니다'라는 표현과 '30% 할인'이라는 표현에서 받는 느낌의 차이는 프레이밍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먼저 50만 원짜리 제품을 본 뒤 30만 원짜리 제품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 판단한다면 앵커링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높은 정가를 먼저 보여주고 큰 할인율을 강조하는 것처럼 두 효과가 동시에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지의 배치도 기준점을 만들 수 있다
세 가지 구독 상품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기본형은 월 8천 원, 일반형은 1만 5천 원, 고급형은 4만 원입니다.
고급형을 보기 전에는 1만 5천 원이 비싸게 느껴졌던 사람도 4만 원짜리 선택지를 본 뒤에는 일반형이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반형이 실제로 자신에게 필요한 상품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용하지 않을 기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 가장 저렴한 상품이 더 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격대를 비교할 때는 가장 비싼 상품과 비교해 얼마나 저렴한지를 보기보다 내가 실제로 필요한 기능을 기준으로 다시 판단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외부에서 제공된 가격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가 기준점이 되는 셈입니다.
앵커링의 영향을 줄이려면 내 기준을 먼저 만드는 편이 좋다
중요한 구매를 앞두고 있다면 판매자가 제시하는 숫자를 보기 전에 간단한 기준을 정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자를 구입한다면 먼저 사용할 수 있는 예산과 꼭 필요한 기능을 정합니다.
그다음 여러 판매처의 실제 판매가격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하면 처음 본 높은 정가나 특정 판매자의 가격이 전체 판단을 지배하는 것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습니다.
중고 거래에서도 비슷합니다.
판매자가 부른 가격을 본 뒤 적정 가격을 고민하기보다 여러 거래 사례를 먼저 살펴보면 독립적인 기준을 만들기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숫자를 무조건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숫자가 어떤 근거로 만들어진 기준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숫자를 기준으로 삼기 전에 한 번 더 비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숫자를 접합니다.
정가와 할인가, 예상 배송시간, 이용자 수, 평점, 구독료처럼 선택을 돕기 위한 숫자가 곳곳에 있습니다.
숫자는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정확하다는 것과 그 숫자가 적절한 비교 기준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30만 원이라는 정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내가 그 제품에 30만 원의 가치를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제시된 숫자는 판단을 빠르게 시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때로는 이후의 생각을 특정 범위에 머물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구매나 협상을 앞두고 있다면 '내가 처음 본 숫자가 없었다면 얼마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을까?'라고 한 번 질문해 볼 만합니다.
앵커링 효과를 이해하는 목적은 모든 숫자를 의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남이 먼저 제시한 기준과 내가 실제로 사용할 기준을 구분하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알고 나면 할인 가격부터 구독 상품, 중고 거래와 각종 협상까지 우리가 숫자를 바라보고 선택하는 방식도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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